바둑은 한 수 한 수의 흐름이 모여 최종 결과를 결정짓는 게임입니다. 특히 국제대회에서는 한 수의 선택이 전체 판세를 바꾸며 명국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국 내내 불리했던 기사가 끝내기에서 승리를 거두거나, 마지막 한 수로 전체 형세를 뒤집는 장면은 바둑 팬들에게 오래도록 회자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바둑 역사상 국제 무대에서 펼쳐진 세 번의 대표적인 역전승을 선정하여 소개합니다. 이 대국들은 전략과 수읽기, 심리 모두에서 교과서적인 의미를 갖는 경기들입니다.
1. 이창호 vs 유창혁 – 제4회 삼성화재배 결승 제3국 (1999년)
1999년 제4회 삼성화재배 결승 3번기 3국에서 이창호 9단과 유창혁 9단이 맞붙었습니다. 이 대국은 당시 두 기사 모두 정상급 기량을 유지하고 있던 시기였고, 특히 유창혁 9단은 초반부터 뛰어난 포석 운영으로 형세를 주도하였습니다. 중반까지 이창호 9단은 실리에서 크게 뒤지고 있었으며, 다수의 전문가들도 유창혁 9단의 승리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이창호 9단은 후반부에 접어들며 특유의 집요한 끝내기를 통해 차근차근 격차를 좁혀 나갔습니다. 특히 중앙에서 발생한 작은 패싸움에서 상대의 응수를 정확히 유도한 후, 마지막 몇 수에서 1집 차이의 극적인 역전을 만들어냈습니다. 결과는 흑 1집승. 이 경기에서 보여준 이창호의 침착함과 계산력은 이후에도 수많은 대국에서 회자되며, ‘끝내기의 신’이라는 별명이 다시 한 번 각인된 순간이었습니다.
2. 커제 vs 박정환 – 제22회 LG배 결승 제2국 (2018년)
2018년 LG배 결승전은 중국의 커제 9단과 한국의 박정환 9단이 맞붙은 대국으로, 당시 세계 랭킹 1~2위를 다투던 기사들의 대결이었습니다. 1국을 먼저 잡은 커제는 2국에서도 중반까지 안정적으로 형세를 이끌며 결승을 조기 마무리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박정환 9단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기회를 노렸고, 후반부에서 결정적인 중앙 싸움을 유도하며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이 경기의 핵심은 커제의 대마 공격이 지나치게 깊었던 반면, 박정환은 버리는 수를 선택하며 세력 확장을 통한 반격을 시도한 점입니다. 결국 커제의 과도한 공격은 실리 손실로 이어졌고, 박정환은 중앙을 장악하며 승리를 가져갔습니다. 당시 이 대국은 단순한 전략 싸움을 넘어서, 심리전과 형세 판단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시켜준 명국으로 평가받습니다.
3. 장쉬 vs 조훈현 – 제1회 응씨배 8강전 (1988년)
제1회 응씨배 8강전에서 벌어진 조훈현 9단과 중국의 장쉬 9단의 대국은 당시 국제 바둑 무대에서의 한·중 간 자존심 대결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조훈현 9단은 초반부터 거침없는 전투형 바둑을 펼치며 우세를 이어갔고, 바둑 해설자들 역시 그가 무난히 이길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하지만 장쉬는 중반 이후 조용히 형세를 정리해 나가며, 끝내기에서 조훈현의 실수를 유도했습니다. 특히 우변 끝내기에서 발생한 젖힘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수순이 몇 수만 달라졌어도 결과가 바뀔 수 있었던 접전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장쉬가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고, 이는 중국 바둑이 본격적으로 국제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첫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결론: 역전승은 바둑의 본질을 보여준다
바둑은 단 한 수로 모든 흐름이 바뀔 수 있는 게임입니다. 위에서 소개한 세 경기는 모두 경기 초중반까지는 패색이 짙었지만, 대국자의 수읽기와 집념, 상황 판단 능력으로 결과를 뒤바꾼 사례들입니다. 특히 끝내기 능력, 전투 시 냉정한 대응력, 상대 심리를 꿰뚫는 감각은 고수들이 보여주는 공통된 역전의 요소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명국은 단순한 승패를 넘어서 바둑의 전략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장면들입니다. 실제로 많은 바둑 학습자들이 이런 명국을 복기하며 수읽기 감각을 키우고 있으며, 대국자의 결정이 왜 그렇게 이루어졌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한 학습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명국은 바둑의 깊이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계속해서 회자될 것입니다.